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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독립운동가 홍병기(洪秉箕: 천도교계 3·1운동 민족대표)선생

DOCU/History Written on 2009.03.01 13:51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1919년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1920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한 후에도 중국 길림에서 1926년 고려혁명당 창당에 참여하여 재차 2년간 옥고를 치른 선생의 공훈을 기리고, 3·1절 9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고자「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1869년 11월 8일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에서 홍익룡과 한익화의 2대독자로 출생한 선생은 어려서 한학을 배우고 무예를 익혀 1887년 19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24세 때인 1892년 현실사회 개혁의 큰 뜻을 품고 동학에 입교한 선생은 1894년에 손병희의 휘하에서 무장, 영동, 보은, 음성, 공주 우금치전투 등에 참가하였고, 1905년 12월 동학이 천도교로 개편된 후 천도교중앙총부에서 중요 교직자로 활동하였다.

이후 1910년 한일합병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갖고 있던 선생은 1918년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것을 알고 조선도 이에 따라 독립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1919년 2월 10일 권동진을 만나 구체적인 독립운동 방안을 모색한 선생은 3월 1일, 민족대표와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체포되어 징역 2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선생은 1922년 7월 14일 고려혁명위원회를 결성, 고려혁명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조직을 주도하였고, 1924년 4월 5일 천도교최고비상혁명위원회를 재조직하고 집행위원장에 선임되어 외교부장 최동희와 함께 러시아의 후원을 얻어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고려혁명당 조직이 탄로나면서 관련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단행되었고 선생도 1927년 1월 19일 체포되었으며 1928년 4월 20일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오랜 기간의 옥고와 고문으로 쇠약해진 선생은 1949년 1월 26일 81세의 일기로 영면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였다. 

참고 사이트
국가보훈처: http://www.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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