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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독립운동가 남상목(南相穆) 선생

DOCU/History Written on 2008.11.01 15:11

지지 않는 별, 영원한 경기 의병장

남상목 선생은 1876년 4월 12일(고종 13년)에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하산운리(현, 성남시 분당구 하산운동)에서 유교가문인 의령남씨 진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동천(東泉), 자는 문일(文一)이다. 선생은 경기도 용인 일대 및 충북 지역에 걸쳐 일본군과의 수차례 전투에 참가한 의병장으로 경기도 안성으로 진격하여 크게 승리를 거두었으나, 1908년 친일 밀정의 밀고로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일제의 혹독한 고문 끝에 장이 파열되어 순국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로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자 국가보훈처는 11월의 독립운동가로 남상목(南相穆) 선생을 선정하였다.

선생은 가학으로 한학을 수학하여 경학은 물론 주역과 병서류에도 조예가 깊었다. 특히 충과 효의 실행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남상목이 29세 되던 해인 1904년 그의 고향인 낙생면까지 일제의 수탈이 자행되었다. 일제는 러시아와의 전쟁 수행을 위해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고 강제로 조선인의 인력과 재원을 수탈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해  5월경 일제는 낙생면 하운산리의 울창한 수목을 무기 자재로 사용하기 위하여 낙생면과 언주면, 돌마면 등 3개 면민을 동원하여 수목을 벌채하였다. 더욱이 주민들에게 이를 운반하는 작업을 시켜놓고 노임도 지불하지 않는 만행을 저지르자 남상목은 일본인 감독관 나가이를 폭행하는 등 이에 항거하였다.

선생은 이 일로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온갖 체형을 당하고 풀려났다. 이 사건은 그가 항일의병을 일으키게 된 계기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이 사건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국가의 외교권마저 빼앗기는 망국의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1907년 7월 고종이 강제퇴위 당하고 정미7조약이 체결되었다. 정미조약의 부수각서에 의해 8월 1일에는 한국군이 강제로 해산되었다. 일제의 한국군 해산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육군 1개 대대 이외의 모든 한국군을 무장해제하고 해산하였다.

선생은 고향인 광주 일대에서 이에 항거하여 의병을 모아 활동하였다. 그의 휘하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된 김재선 등의 판결문에 따르면, 그는 군대해산 후 의병이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때인 1907년 8월경 경기도 용인의 용천곡 일대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그는 휘하에 50여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무기도 구식총 40자루와 신식총 10자루를 갖춘 의병대의 대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선생은 1908년 8월경에 김재선 등을 자신의 의병부대에 편입시켜 김재선을 좌익장, 강춘선을 후군장, 송주상과 김태동을 종사, 김경화와 이시영을 포군으로 임명하였다. 선생은 의병의 전열을 정비하고 음성에서 일본군과의 전투를 전개하였다. 의병대는 비록 패했지만 격전을 벌였다.
남상목의 수하에서 활동하던 김재선(’95 애국장)은 음성전투에서 패한 후 잔병 30여명과 같이 죽산의 칠정사로 들어가 전봉규·민병찬 등이 이끄는 의병대와 합류하여 안성 전투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김재선은 전봉규·민병찬 의병한테 오히려 무기를 빼앗기고 그해 8월초에 상경하였다가 1908년 3월에 체포되어 10년 유형을 선고받았다.

송주상(‘95 애국장)은 패산한 뒤인 1907년 7월에 김산(현:김천)의 조상철을 찾아 갔다가 오는 길에 천안에서 의병(대장: 申씨)에 참여하였다가 곧바로 상경하여 ‘은공’의 일을 하다가 1908년 3월에 체포되어 역시 10년 유형을 선고 받았다. 김태동(‘95 애국장)은 청안(현, 괴산군 청안면) 못 미쳐 탄동에서 남상목 의병대를 만나 활동하다가 상경하여 덕어학교에 입학하였으며, 명동에 있는 한일인쇄사에 근무하던 중 1908년 3월에 체포되어 10년 유형을 선고받았다. 김태동의 활동 사항으로 보아 남상목 부대의 활동범위가 경기도 용인 일대에서 충북 지역까지 펼쳐져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선생은 1908년 11월 판교의 가족을 만나러 가던 중 밀고를 받고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느릿골"에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복역하던 중 고문의 후유증으로 생긴 장파열로 1908년 11월 4일에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그의 유해는 청계산 아래 ‘후천골’에 가매장 되었으며, 해방 후에 고향인 성남시 하산운동의 ‘뒷내골’ 선산에 안장되었다가 대전의 애국지사 묘역에 부인 이순이여사와 합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12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기념행사
  ㅇ 11월의 독립운동가 남상목선열 기획사진전
      - 기  간 : 2008. 11. 1∼ 11. 30
      - 장  소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독립기념관

  ㅇ 11월의 독립운동가 남상목선열 공훈선양 학술강연회
      - 기  간 : 2008. 11. 4 (화)  11:00~
      - 장  소 : 경기도 성남문화원 강당(3층)
      - 주  관 :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02-365-4387~8)


Comments
  1.   촌사람 on 2008.11.04 18:33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이런 독립운동가가 있었군요. 일제의 고문이 얼마나 악랄했으면 장파열로 돌아가시다니...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좋은 글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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