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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중정 기념당(中正紀念堂)

World Tour/Travel Written on 2008.06.06 16:53

타이페이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소로 대만의 영웅 장개석을 위한 기념물이다. 그림같이 조경이 잘 된 광대한 정원 위에 거대한 대리석 건물인 기념관이 서있고, 우아한 정자, 연못 등이 배치되어 있다.

25톤의 장개석 총통 동상이 본관에서 시내를 바라보고 있으며, 1층 전시실에는 사진과 총통의 생애에 관한 기념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기념당의 높이는 70m이며, 중화 문화의 품격을 잘 반영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외부는 청색과 흰색 두 가지를 주로 하고 있는데, 이 색들은 자유와 평등을 상징한다. 우아한 명나라식의 아치가 정문이며 양측에 두 개의 고전적 건물이 있는데 각각 국립극장과 콘서트 홀이다.

광장에는 매일 아침 5시경부터 태극권, 포크 댄스, 배드민턴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 시민들의 쉼터 역할을 한다. 장개석은 195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한민국의 독립을 지원한 공로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장개석은 1945년 김구의 귀국시 미화 20만 달러라는 거금을 주었으나, 김구는 미군정의 방해로 이 돈을 국내에 들여오지 못했다.



장제스(장개석: 蔣介石)  또는 장중정(蔣中正) 1887년 10월 31일 ~ 1975년 4월 5일
장개석은 중국의 정치·군사 지도자이다. 황푸군관학교 교장, 국민혁명군사령관, 국민정부정석, 행정원장, 국민정부군사위원회위원장, 중화민국 총통, 중국 중국 국민당 총재, 삼민주의 청년단 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초기의 생애
1887년에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저장 성(浙江省) 펑화현(奉化県)에서 소금상인 장지총(蔣肇聰)과 왕차이위(王采玉)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중상층 상인 집안이었는데 아버지는 장이 8살때 죽었다. 전통에 따라 장은 이웃마을의 여인 마오푸메이와 결혼하였는데 이 결혼에서 아들 장징궈과 딸 장치엔화를 낳았다.
장제스가 청소년기를 보낸 시기는 중국 군벌의 군웅할거와 외세의 침입으로 군사적으로 중국이 매우 약해진 시기였고 야심많았던 장은 군문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고 1906년 바오딩군관학교에서 군사수업을 받았고 이듬해에는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하여 1909년 5월 27일 21기로 졸업하였다. 일본에서 그는 다른 유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봉건적인 청조에 반대하고 중국에 새로운 공화국을 세우고자하는 열망을 가지고 중국동맹회에 가입했다. 1909년부터 1911년까지 장은 일본 제국군에서 복무했다.
1911년 신해혁명이 터지자 중국으로 돌아와 혁명군을 이끌었고 군사적인 재능을 보여 쑨원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이후 위안스카이의 반동정책에 맞서 싸웠고 잠시 상하이의 지하 폭력조직인 청방에도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1918년 그는 다시 쑨원의 휘하에서 군사업무를 보았고 1923년 쑨원과 그의 아내 쑹칭링을 암살범의 기관총 공격에서 구해내어 쑨원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이무렵 쑨원은 소비에트 연방과 손잡고 제1차 국공합작을 실시했는데 이때 장제스는 군사자문단으로 소비에트로 가서 소비에트군을 연구하고 돌아왔다. 당시 중국 혁명의 성공여부는 바로 군사력에 달려있었는데 쑨원은 혁명을 실천할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광저우에 황푸군관학교를 설립하였고 장제스는 그 학교의 초대 교장이 되었다. 장은 이 학교에서 자신의 부하들을 많이 길러냈으며 황푸학교는 국민당내에서 장제스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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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 오름

1925년 3월 12일 쑨원이 죽자 국민당의 권력을 놓고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장제스는 국민당 우파로 기울었고 쑨원의 또다른 신임을 받고 있던 왕징웨이는 국민당 좌파의 우두머리가 되어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장제스는 상대적으로 왕보다 국민당내의 서열이 낮았지만 황푸학교 출신의 부하들의 지지와 군사력을 바탕으로 중산함 사건을 이르켜 결국 국민당 권력을 잡았다.
한편 국민당은 1925년 국민혁명군을 창설하고 장제스는 그 총사령관이 되어 군벌들로 부터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대규모 군사작전을 펼쳤는데 이 때 국민당군은 세개의 파로 나뉘어 북쪽으로 진군했다. 이 때 우한으로 진군한 왕징웨이등 국민당 좌파는 우한에서 장제스의 국민당과 별개의 우한국민당 정부를 세우고 장제스와 대립하게 되는데 난징과 상하이를 탈환한 후 장제스는 국민당내 좌파와 공산당을 소탕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1927년 4월 12일 장제스는 상하이에서 대대적인 공산당 소탕작전을 펼치고 이후 중국 전역에서 대규모 공산주의자 학살이 일어났다. ([[4.12사건 참조) 이 사건으로 좌파을 일소한 장제스는 거침없이 북벌을 단행하였고 1928년 6월 베이징을 탈환하고 마지막 남은 펑톈군벌 장쉐량을 복속시켜 마친내 중국을 국민당의 깃발 아래 통일 시켰다.
한편 장은 유력하고 부유한 가문인 쑹가문과 유대를 맺고 기독교로 개종한 후 1927년 쑹메이링과 결혼하였다.
장제스는 국민당 정권의 총통이 되어 강력한 군을 바탕으로 권력을 잡았다. 원래 쑨원의 계획대로라면 그는 새로운 중국은 민주적인 절차와 헌법을 가져야 했으나 장은 당면한 현안문제들 (잔존 군벌의 불안, 중국 공산당의 분열, 가속화 하는 일본의 침략)등을 들어 자유주의적 운동을 탄압하고 완전한 개혁을 이루지 못하였다. 장제스는 특히 공산당이 지배하는 지역을 완전히 정복하기 전까지는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지 않기로 하였고 일본은 야금야금 대륙을 침입해 들어왔다. 그는 1930년부터 지속적으로 공산당 지배지역에 대한 토벌전을 벌였는데 완전히 섬멸할 수 없었다.
장제스는 중국 국민들에게 유교적 국가숭배의식을 부활시켰고, 신생활운동을 전개했으며 자신을 곧 국가와 동일시하는 정책을 폈다. 특히 남의사와 같은 비밀 준 경찰 조직을 동원하여 공산주의자와 자신의 정권에 반대하는 인사들을 탄압하고 언론의 자유를 억압했다.

중일 전쟁과 내전
계속되는 토벌전으로 중국 공산당은 결국 주요 근거지인 장시 성 해방구를 잃게 되고 홍군은 필사적인 후퇴전술을 택해 중국대륙을 돌아서 산시 성에 이르는 이른바 대장정을 감행한다. 장제스는 옌안을 중심으로한 새로운 공산당 근거지에 대한 총공격을 준비하고 잇었는데 1936년 12월 12일 장쉐량이 [[시안 사건]을 일으키고 이로서 상황은 급변하여 장제스는 제2차 국공 합작을 결성하여 항일 전쟁에 들어간다.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고 장제스는 국민정부를 난징에서 충칭으로 옮기고 1941년 연합군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기 전 4년동안 중국은 단독으로 일본과 교전했다. 그러나 1945년부터는 다시 중국공산당과 사이에 국공내전이 발발하여 1949년에는 종국적으로 패배하여 대만으로 도피하게 된다.

타이완 시절
타이완으로 건너가 그 후 1950년에 총통으로 취임하고 본토 회복을 위한 몇차례 대륙으로 진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내치에 전념하여 한때 부패했던 국민당 조직을 개편했고, 공산 중국에 맞서는 자유의 선봉으로 나섰다. 1955년 미국은 국민정부와 타이완 방위를 보장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미국의 방위우산으로 편입하고 그 원조에 힘입어 그후 20년 동안 타이완의 경제발전을 실현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972년초 미국과 중국 사이에 관계개선이 이루어지면서 타이완은 고립되었고그러던 와중 1975년에 사망하였다. 그가 죽자 아들 장징궈가 국민당 주석 및 타이완 정부 수반으로 그 뒤를 이었다

장제스에 대한 역사적 평가
장제스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관하여는 중화민국의 지도자로서 칭송받는 면과 공산주의자를 탄압한 4·12 쿠테타를 일으킨 독재자로서 비판받는 양면이 존재한다. 장제스는 국공내전에서 패한 이유가 국민당의 부정부패이었기 때문에, 중화민국의 공직자들의 부정부패를 강력한 처벌로 일소하였다. 하지만, 국민당이외의 정당들은 형식적인 정당에 불과한 국민당 1당독재, 백색테러로 불리는 극우테러, 반체제인사들에 대한 탄압으로 중화민국의 민주주의가 늦게 뿌리내리게 한 독재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출처: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Comments
  1.   박혜연 on 2008.12.02 18:50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모택동과 장개석은 영웅호색답게 여자들과의 관계가 복잡한사람이다! 그러나 모택동이 세명의 부인사이에 10남매를 두었지만... 장개석은 첫부인사이에 겨우 아들한명(장경국 총통) 딸한명만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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